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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순위가' - 내 입버릇이 된 그 말의 무게

'우선순위가' - 내 입버릇이 된 그 말의 무게

'우선순위가' - 내 입버릇이 된 그 말의 무게 아침 9시, 리스트 작성 출근했다. 커피 뽑고 앉았다. 오늘도 리스트부터 쓴다.배포 전 최종 검증 팀원 1on1 (3건) 경영진 품질 리포트 신규 기능 테스트 전략 회의 자동화 환경 장애 대응5개다. 하루는 8시간이다. 계산이 안 맞는다. 매일 그렇다. "우선순위가 뭐야?" 혼잣말이다. 13년 차의 입버릇. 이제 자동으로 나온다. 숨 쉬듯. 중요한 게 5개면 우선순위가 없는 거다. 중요한 게 1개가 되어야 우선순위다. 그래서 4개를 포기해야 한다. 아니, 포기가 아니다. '미루는' 거다. 그렇게 생각하면 덜 무겁다. 조금.오전 10시, 첫 번째 선택 개발팀 리드가 슬랙 보냈다. "배포 일정 하루 당깁니다. 가능할까요?" 불가능하다. 테스트 시간이 부족하다. 하지만 "불가능"이라고 답할 수 없다. 그러면 협업 안 하는 팀이 된다. "우선순위 정리해서 답변드릴게요." 또 나왔다. 우선순위. 지금 하던 일을 멈췄다. 배포 범위를 확인했다. 30개 기능 변경. 리스크 분석했다. 고위험 7개, 중위험 15개. 핵심만 테스트하면 된다. 나머지는... 운에 맡긴다. "핵심 기능 7개는 검증 가능합니다. 나머지는 배포 후 모니터링으로." 답장 보냈다. 속은 불편하다. 하지만 이게 현실이다. 우선순위를 정한다는 건 뭔가를 포기한다는 뜻이다. 팀원들한테 공유했다. "이번 배포는 고위험 케이스 위주로." 다들 안다. 완벽한 테스트는 없다는 걸. 그래도 말해야 한다. 책임은 내 거니까. 오후 2시, 두 번째 선택 1on1 시간이다. 3년 차 팀원. "팀장님, 자동화 공부하고 싶어요." 좋다. 당연히 지원해야 한다. 팀의 미래다. 투자해야 한다. "근데 지금 당장은 수동 테스트가 급해서..." 또 나왔다. 우선순위. 팀원의 성장 vs 당장의 일정. 미래 vs 현재. 투자 vs 실행. 항상 이 선택이다. 정답은 없다. 둘 다 중요하다. "일단 이번 스프린트는 수동 위주로. 다음 달부터 자동화 시간 30% 배정할게." 팀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은... 실망이 섞였다. 나도 안다. 다음 달에도 급한 게 생긴다는 걸. 30%는 20%가 되고, 10%가 된다. 결국 안 된다. 하지만 지금 당장 배포가 막히면 팀 전체가 욕먹는다. 우선순위를 정한다는 건 누군가를 실망시킨다는 뜻이다.오후 4시, 세 번째 선택 경영진 보고 준비했다. 이번 분기 품질 메트릭스.배포 성공률: 87% 장애 재발률: 12% 테스트 커버리지: 63%숫자가 안 좋다. 이유는 안다. 테스트 시간이 부족했다. 자동화 투자가 없었다. 보고서에 쓴다. "품질 개선을 위해 자동화 투자 필요" 그리고 지운다. 경영진은 숫자를 원한다. "얼마나 걸려? 효과는?" 대답 못 하면 승인 안 난다. 다시 쓴다. "현재 일정 내 최선의 결과. 지속 모니터링 중" 우선순위를 정한다는 건 하고 싶은 말을 참는다는 뜻이다. 회의 들어갔다. 30분. 임원이 물었다. "장애율이 왜 올랐죠?" "일정이 촉박해서 테스트 범위를 조정했습니다." "그럼 일정을 지키는 게 우선순위였단 거네요?" 그렇다. 맞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무능해 보인다. "리스크 기반으로 우선순위를 정했습니다. 치명적 장애는 없었습니다." 임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 끝났다. 복도 걸어 나온다. 숨이 답답하다. 품질이 우선이다. 맞다. 하지만 일정도 우선이다. 비용도 우선이다. 팀 사기도 우선이다. 전부 우선이면 뭐가 우선인가. 오후 6시, 네 번째 선택 배포 1시간 전이다. 개발팀에서 연락 왔다. "기능 하나 더 넣어도 될까요? 작은 거예요." 안 된다. 절대 안 된다. 배포 직전 변경은 재앙이다. 13년 경험이 말한다. 하지만 물었다. "얼마나 중요한 거예요?" "CEO가 오늘 데모 보고 싶대요." 그렇구나. 다시 계산한다. 리스크: 높음. 일정: 불가능. 정치: 중요. "30분 줄 테니 빠르게 확인만 할게요. 풀 테스트는 못 해요." 전화 끊었다. 팀원한테 말했다. "미안한데 급한 거 하나만..." 팀원이 웃었다. 쓴웃음. "괜찮아요. 늘 그렇잖아요." 늘 그렇다. 우선순위를 정한다는 건 원칙을 꺾는다는 뜻이다.밤 9시, 다섯 번째 선택 배포 끝났다. 장애 없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팀원들한테 메시지 보냈다. "수고했어요. 내일 점심 제가 살게요." 답장 온다. 고맙다고. 미안하다는 말은 안 한다. 너무 많이 해서. 집에 가는 길. 지하철에서 리스트를 본다. 오늘 아침에 쓴 5개. 실제로 한 건 15개다. 계획한 건 2개뿐이다. 나머지는 전부 '급한 거'. 우선순위가 바뀐 거다. 10번. 그게 내 일이다. 우선순위를 정하는 게 아니다. 우선순위가 바뀌는 걸 관리하는 거다. 현관문 열었다. 딸이 달려온다. "엄마 늦었어!" 늦었다. 맞다. 남편이 저녁 차려놨다. "힘들었어?" 힘들었다. "내일은 일찍 와?" 모른다. 내일도 우선순위가 바뀔 거다. 항상 그랬다. 밤 11시, 마지막 생각 침대에 누웠다. 핸드폰 본다. 습관이다. 슬랙에 메시지 왔다. 내일 새벽 배포 추가래. 급하대. 한숨 나온다. 답장은 내일 하자. '우선순위'라는 말 생각한다. 13년 동안 몇 번이나 했을까. 하루 평균 10번이면... 계산하기 싫다. 이 말의 무게. 포기, 실망, 타협, 책임. 전부 여기 들어있다. QA 팀장의 일은 완벽한 품질을 만드는 게 아니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매일 우선순위를 정하는 거다. 뭘 지키고 뭘 포기할지. 누굴 실망시키고 누굴 설득할지. 어떤 리스크를 안고 어떤 리스크를 피할지. 정답은 없다. 그냥 선택만 있다. 내일도 선택할 거다. 모레도 선택할 거다. 핸드폰 내려놓는다. 눈 감는다. "우선순위가..." 잠들기 전 마지막 생각이다. 내 입버릇이 된 이 말. 무겁다.매일 우선순위를 정한다. 그게 내 일이다. 완벽은 없다. 선택만 있다. 내일도 똑같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