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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 04 Dec, 2025
'QA는 왜 항상 일정을 늘려달라고 해?' - 경영진과의 대화
또 이 대화 경영진 회의실이다. 에어컨 온도는 22도. 나는 노트북을 연다. "QA 기간 2주 더 필요합니다." CPO가 한숨을 쉰다. "왜 항상 QA는 일정을 늘려달라고 해?" 13년 했다. 이 질문 100번은 들었다. 개발은 3주 늦어도 "기술 부채"라고 하면 넘어간다. QA가 2주 요청하면 "일정 지연"이 된다. 이게 현실이다. 오늘도 숫자 싸움이다.준비한 무기들 회의 30분 전. 자료를 다시 확인했다. 지난 3개월 장애 리포트. 배포 후 긴급 핫픽스 12건. 고객 클레임 48건. CS 처리 비용 2400만원. "테스트 기간 부족이 원인"이라고 적힌 포스트모템이 7건이다. 이번 릴리즈는 결제 모듈 개편이다. 리스크가 다르다. 리그레션 범위만 1200개 케이스다. 자동화로 커버되는 건 40%. 나머지는 수동이다. 팀원 8명. 계산하면 최소 15일이다. CPO는 "10일 안에"라고 했다. 불가능한 숫자다. 근데 "불가능"이라고 하면 끝이다. 숫자로 말해야 한다.대화의 기술 "10일로 줄이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드리겠습니다." 스크린에 표를 띄운다.시나리오 테스트 커버리지 예상 누락 결함 배포 후 장애 확률15일 (요청) 92% 2-3건 15%10일 (현재안) 67% 8-12건 45%7일 (최악) 48% 15건+ 75%CFO가 몸을 앞으로 기울인다. "45% 장애 확률이면 비용이 얼마죠?" 준비한 슬라이드다. "지난 분기 결제 장애 1건당 평균 처리 비용 320만원입니다. 개발 긴급 투입, CS 대응, 보상 비용 포함입니다. 10건 터지면 3200만원입니다." "QA 2주 연장 비용은 팀 인건비 기준 480만원입니다." CPO가 펜을 내려놓는다. 숫자는 거짓말을 안 한다. 근데 이 숫자를 만들려고 새벽 2시까지 엑셀 돌렸다는 건 말 안 한다. 그들이 듣고 싶은 말 "대안은 있습니까?" 이 질문이 나오면 절반은 이긴 거다. "세 가지 옵션 준비했습니다." "첫째, 테스트 범위 축소. 결제 코어만 집중. 주변 기능은 스모크 테스트만. 리스크는 남지만 12일로 가능합니다." "둘째, 외부 QA 인력 투입. 3명, 1주일. 비용 900만원. 일정은 10일로 맞출 수 있습니다." "셋째, 스테이지 배포 후 모니터링 강화. 실사용자 5% 먼저 오픈. 문제없으면 전체 배포. 초기 대응 리소스 확보 필요합니다." CPO가 고개를 끄덕인다. "셋째로 가죠. 대신 QA팀이 배포 후 3일간 온콜 가능합니까?" "가능합니다. 대신 다음 스프린트 계획 조정 부탁드립니다." "OK." 회의는 40분 만에 끝났다. 이게 정치다. 내가 원하는 15일은 못 받았다. 근데 10일에 무리한 범위 떠안는 것도 막았다. 타협이다. 매번 이렇다.회의실을 나와서 슬랙에 팀원들한테 메시지 보낸다. "스테이지 배포 방식으로 결정. 코어 시나리오 집중. 배포 후 3일 온콜 체제. 다음주 월요일 킥오프 미팅." 답장이 바로 온다. "또요?" "네..." "알겠습니다ㅠ" 미안하다. 근데 이게 최선이었다. 자리로 돌아와서 커피를 마신다. 세 번째다. 다음 회의는 1시간 후다. 개발 리드랑 테스트 범위 협의. 거기서 또 싸워야 한다. "이건 QA 범위 아니지 않냐", "개발에서 체크했으면 됐지", "왜 이걸 또 테스트해야 하냐." 경영진한텐 일정 늘려달라고 하고, 개발팀한텐 범위 줄이자고 한다. QA 팀장이 하는 일이다. 아이러니하다. 품질 책임자인데 품질 타협을 제일 많이 하는 사람이 나다. 숫자로 말해야 산다 신입 때는 몰랐다. "품질이 중요합니다", "리스크가 있습니다", "장애 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될 줄 알았다. 안 먹힌다. 경영진은 숫자를 본다. 확률, 비용, ROI. 그래서 나는 엑셀을 판다. 지난 1년간 모든 장애를 분석했다. 원인별, 비용별, 테스트 커버리지와의 상관관계. 피봇 테이블을 20개는 만들었다. "테스트 커버리지 10% 감소 시 장애 발생률 1.8배 증가" 이런 문장 하나 만들려고 3개월 데이터를 긁는다. 근데 이게 있으면 회의실에서 산다. CFO는 비용으로 말하면 듣는다. CPO는 일정 대안 주면 듣는다. CTO는 기술 부채 연결하면 듣는다. 같은 이야기를 세 가지 언어로 준비한다. 관리자가 되고 나서 배운 거다. 나는 QA 전문가인데 경영 통역사가 됐다. 팀원들한텐 못 보여주는 것 팀원들은 모른다. 내가 회의실에서 얼마나 싸우는지. "QA는 왜 항상 시간 더 달라고 해?"라는 말을 몇 번이나 듣는지. 그냥 "일정 조정됐어, 이렇게 하자"고 말한다. 왜냐면 팀원들은 테스트에 집중해야 하니까. 이런 정치 싸움에 에너지 쓰면 안 되니까. 근데 가끔 후배가 묻는다. "팀장님, 우리가 요청한 거 다 받아들여진 거예요?" 아니다. 절반도 못 받았다. 근데 "응, 최선이었어"라고 답한다. 이게 리드의 역할이다. 밖에서 싸워서 안으로 들어올 땐 방패가 되는 거. 팀원들은 내가 경영진한테 까이는 걸 볼 필요 없다. 나만 알면 된다. 집에 가면 남편한테 푼다. 남편도 개발 리드니까 안다. "QA는 항상 그런 거야, 고생했어." 위로는 안 되는데 그래도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다행이다. 다음 릴리즈는 또 이번에 타협했다. 다음에도 타협할 거다. 근데 완전히 지는 건 아니다. 지난 2년간 내가 쌓은 데이터 덕분에 QA팀 예산은 30% 늘었다. 자동화 인프라 투자도 승인받았다. 팀원 2명 증원도 했다. 회의 한 번에 다 이기는 건 불가능하다. 근데 매번 조금씩 근거를 쌓으면 흐름은 바뀐다. "QA는 왜 항상 일정 늘려달라고 해?" 이 질문을 듣지 않는 날이 올까? 모르겠다. 근데 이제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 질문을 받는다는 건, 우리가 일정에 영향을 줄 만큼 중요한 존재라는 뜻이다. 10년 전엔 QA는 의견도 못 냈다. 일정은 개발팀이 정했고 QA는 주어진 시간에 맞췄다. 지금은 회의실에 앉아서 숫자로 말한다. 타협은 하지만 무시당하진 않는다. 이게 내가 13년 동안 싸워서 얻은 거다.오늘도 이겼다고 할 순 없다. 근데 지지도 않았다.